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문단 편집) == 평가 == 역사가 브렌트 쇼가 평가했듯이, 이전 군인 출신 황제인 [[트라야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달리 3~5세기 집권한 하층민 출신 로마 황제들과 많이 비슷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막시미누스는 5세기 황제 중 동향 출신의 로마 황제들인 [[리키니우스]], [[갈레리우스]] 등과 많이 비슷해보여도 쇼를 비롯한 학자들의 평가처럼 말 그대로 직업군인 출신 중 제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즉위 당시부터 정통성 부분에서 자신의 실력이 어느 한 쪽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치 경력이 일천해도 그가 황제로서 인정받거나, 최소한 제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지지가 필요했는데, 불행히도 막시미누스는 순수 군인 출신 황제 중 원로원과의 관계가 가장 험악했고, 관계 개선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은데다 즉위 과정에서도 민중들에게 평판이 상당히 좋았던 전임자와 그의 가족, 친구 등을 모조리 학살해버렸다. 따라서 학자들의 일관된 평가처럼 그의 전투능력은 굉장히 중요했는데,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게르만족과 도나우 강 일대의 야만족들을 상대로는 뛰어난 전사였다고 하더라도,[* 로마군에게 담뱃불 붙여주던 공화정 및 원수정 초기의 게르만족이 아니다. 로마와의 교류를 통해 오히려 부족체제에서 왕국체제로 전환하는 중이었고, 이전에 비해 훨씬 대규모 병력을 체계적으로 동원, 활용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수만 명을 체계적으로 이끄는 수준이 된다.] "황제이기 이전에 원로원 의원이었던" 세베루스 황제의 경호병인 걸 제외하면 원로원과 아무런 연줄도 없는 데다가[* 세베루스 황제는 2세기 원로원의 주류인 푸닉 태생이었지만, 그를 지지한 이들은 푸닉 지방 일부를 제외하곤 거진 일리리아, 갈리아, 시리아 속주 태생들이었다. 더군다나 세베루스는 고향 푸닉을 비롯하여 그리스, 아나톨리아 혈통의 이탈리아 거주 주류 의원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제위경쟁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나 니게르를 지지했고, 세베루스의 화해 제스처에도 뒤통수 칠 궁리만 하면서 세베루스 제거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디오의 주장과 달리, 순수 이탈리아 태생 의원들의 지위를 더욱 보장해주고 지역차별을 받던 갈리아, 히스파니아 출신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면서 푸닉, 그리스, 크레타, 아나톨리아 태생 부자 원로원 의원들을 반역죄로 싸그리 제거했다.] 황제 이전의 지위도 대대장, 그것도 겨우 신병교육대장에 불과했다. 즉, 로마군의 군단 하나를 이끄는 [[군단장]][* 이 당시, 야전사령관인 군단장은 원로원 의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맡았다.]조차 역임하지 못하고 황제가 된건데 그는 지중해식의 공성전에는 전략, 전술적으로 별로였던 것으로 보이고 모든 군경력 역시 특정 민족들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 집중된 모습이었다. 물론 두 전투 방식은 차이점이 있고, 전투방식도 달랐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약점은 신병교육대장 출신으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암살 뒤 옹립된 막시미누스에겐 분명 치명적 약점이었다. 어찌되었든 이것도 능력은 능력인 만큼 그가 공성전을 벌이면서 장기전에 이르게 해서, 병사들의 불만을 일으켰고 몰락했다. 로마 황제들 중 자의, 타의에 상관없이 즉위한 이들에게 군사적 재능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아그리파]]로 대표되는 공화정 시대의 장군들 또는 [[티베리우스]], [[트라야누스]] 같은 로마 황제들처럼 탁월한 천재성이 요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임페라토르이고, 어느 정도 이상의 군사적 재능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순수 군인 출신 황제였고 이를 커버해줄 어떤 특장점도 없었기 때문에 압도적인 군사적 재능은 필수적 요소였다.[* 가장 가까운 시대의 실패한 황제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 [[카라칼라]]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주장을 앞세워 즉위한 [[엘라가발루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 일각에서는 막시미누스 본인이 가진 재능이 부족한 탓에 그가 결국 몰락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막시미누스 트락스 본인이 한때 모시고 다녔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크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그의 상관이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경우에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트라야누스와 비교 했을때 그에 미치지는 못하였어도, 나름 정치적 군사적 능력이 상당히 뛰어난 황제였다. 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원로원과 사이가 나빴어도 군인 이전에 [[아테네]]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변호사이자 원로원 의원이었고, 주변 친구들 역시 원로원 의원들, 법학자, 철학자 등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세베루스도 일단 재위 중반부에 원로원이 자신의 지지자들로 채워지면서 원로원과의 적대관계가 어느정도 누그러졌다. 원로원은 분명 귀족적이고 막시미누스를 이런저런 이유로 좋아하지 않은 집단이었다. 허나 막시미누스의 생각과 달리 원로원과 로마인들은 그에게 무조건적인 승리를 바라지 않았고, 그의 승리는 늘 부담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막시미누스는 함량미달의 황제가 분명했다. 워낙 예의를 중요시하고 가문과 혈통을 중시여기는 원로원이야 막시미누스를 미워할 만 하지만, 막시미누스 치세 기간 내내 벌어진 외부와의 전쟁들은 로마에게 손해가 가득했다. 제국의 인적, 물적 자원은 한정적인데다 제국의 경제적 한계와 생산성 악화는 로마 원로원 수뇌부들도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모두 알고 있던 당연한 상식이었다. 괜히 이전 황제들이 게르만족들이 성장하는 가운데, 무작정 군을 이끌고 막시미누스처럼 예방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전투를 치루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막시미누스가 벌인 전쟁들은 이전의 세베루스, 카라칼라처럼 전쟁 후 투입 대비 산출이 좋은 적과 벌인 것들도 아니었다. 도리어 가난한 게르만족들을 상대로 이겨 전리품을 챙겨도 별볼일 없고, 국고 소모와 피로도는 가중되는 그런 전쟁에 불과했다. 게다가 게르만군이 이미 전력을 상당히 강화한 상태여서 로마군은 전쟁에서 이겨도 피해가 이전보다 커지고 있었고, 재정은 이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말기부터 위기를 보이기 시작해 콤모두스가 전쟁을 일방적으로 끝낼 때 반발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때부터는 페르시아와 게르만을 상대로 한 연이은 전쟁으로 거의 파탄직전이었다. 그런데 이런 전쟁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몰락 전해부터는 도나우강까지 그 전선을 넓혀 싸운다? 그렇다면 원로원이나 로마인들 입장에선 국가 안전을 위해 백번 양보했다고 해도 그를 지지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더욱이 막시미누스는 필요한 군자금을 쥐어짜내면서 티메시테우스 같은 재정 전문가들을 풍요로운 아나톨리아, 그리스, 푸닉 일대에 보내 강도처럼 강탈하면서도 민심 이반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민심이반으로 인한 임금체불 가능성을 군인들이 의식할 그 시점에 막시미누스의 치세가 [[끔살]]로 끝날 확률은 이미 최소 90%를 넘어갔고, 조직적인 반란 없이 소극적인 반발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기만 해도 군인들의 칼이 결국 어디로 향할지는 뻔한 이야기였다. 따라서 3세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평처럼 막시미누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반란이 아니었어도 여러 위험요소로 인하여 언제라도 무너질 황제에 불과했다. 그래서 막시미누스 입장에서는 어쩌면 제국이 혼란기만 아니었고, 자신을 등용하여 지휘관급으로 만들어준 [[세베루스 왕조]]가 유지되었다면, 전선에서 신병들을 토닥이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로마 [[군단장]]을 거쳐 노년에 원로원 의석을 얻어 수도 로마에서 노후를 보장받고 살았을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같은 3세기 황제 중 [[데키우스]]처럼 군단장을 거쳐 원로원 의석을 얻은 상태에서 황제가 되었더라면 군인 황제 시대의 전개가 매우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트락스 몰락의 결정적인 원인은 원로원이 트락스를 매우 싫어했고, 이런 원로원의 태도에 대해 트락스 역시 군대에만 모든 것을 쏟으면서 탄압 등으로 맞대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원로원 외의 다른 상류층이나 로마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았냐고 물으면 이것도 최악이었다. 로마 민중들은 그의 지나친 세금 수탈과 강압적 통치 스타일 탓에 적이 됐고, 상류층들 역시 트락스의 지나친 군비 탓에 그들의 재산을 뺏긴 상태였다. 이런 반감에 대해 트락스는 그들이 자신에게 유화적이지 않다고 해서 또 강경하게 대응했다. 따라서 로마 민중과 상류층 모두 그를 미워했는데, 당시 로마 시민계층이 이미 상급시민과 하급시민으로 분리된 지 오래라는 점과 민중이 상류층 맞아죽는 문제에 거의 신경도 안썼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민심을 잃었는가를 알 수 있다. 군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린 트락스는 이런 단점들 탓에 군사적으로 실패하자 결국 몰락했고,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그 뒤에 등극할 [[갈리에누스]]처럼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혼란스러운 [[군인 황제 시대]]를 연 인물이자, 최초의 사병출신 황제로서 그 뒤로 등장한 사병출신 군인 황제들의 모델이 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브렌트 쇼가 지적했듯,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황제 등극은 곧 등장할 일리리아 하층민 출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퀸틸루스]] 형제를 비롯해, [[갈리에누스]]에게 반기를 든 찬탈자 아우레올루스, 해방노예의 아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쳐 그들이 군대 경력을 통해 제국 최상층부를 차지하는데 깊은 영감을 줬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기번]]은 그의 저서인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막시미누스 트락스가 만약 고대 시대에 태어났다면, 엄청난 힘으로 인류를 위협하던 무시무시한 괴물의 전설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